얼마 전에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을 받았다. 우리 회사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입사 권유였다. IT보안 관련 업을 하는 회사인 듯했는데, (국내 환경상) 특이하게도 Perl 프로그래머를 구인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이 인력을 구인할 때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기에, 사실 조금 놀랐다.
뭐, 덕분에 하루 내내 고민했다. 일단 내 Perl 실력이 현업에서 쓸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같은 코딩에도 몇 배의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하고, 무엇보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시스템에 대한 지식수준이 심각하게 부족할 것이 예상된다. 한마디로 사상누각. 그러나 이런 것은 회사측에서 알고 뽑는다면 문제가 아니다. 하드트레이닝을 통해 알아서 키워주겠다는 이야기일테니. 즉,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진짜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선택을 나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로를 변경한다는 것은, 나의 전공, 그동안 공부해온 것, 인생의 목표들을 모두 백지화하고, 내가 가진 식견으로는 미래가 어떠할 지 짐작할 수 없는 분야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1년간의 공부가 모두 무로 돌아간다.) 사실 가진 것도 없지만,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과, 그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잘 저울질해봐야 한다.
객관적 측면에서, 중소기업이니 연봉이나 근무환경이 좋은 수준은 아닐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지만, 일단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라면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단기적으로는 큰 문제는 안 된다. 사회통념으로 볼 때 무언가 새로운 것에 장기적으로 도전할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업계에서 전문가로 성장하고 입지를 다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협소하기 그지없는 국내 Perl 업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여부도 사실 불분명하다. 주관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지금은 취미생활로 하는 코딩이니 공부하는 와중에 짬짬이 하는 코딩이 즐거울 수 있지만, 이것을 업으로 하면서 최소한 같은 수준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론은, 지금 당장 취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메리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오래 고민할 일도 아니지만, 무려 하루가 지나서야 거절의 쪽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만큼 당장의 "취업"이라고 하는 것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거듭된 시험 탈락과, 관련분야가 아니면 서류통과조차 장담할 수 없는 엄혹한 취업환경을 직접 겪으며, 한 달 전 결국 시험급수까지 변경하는 선택을 했던 나에게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인 선택지였던 것 같다.
뭐, 결국 거절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직 내가 내려놓을 게 많다는 의미가 되겠고, 거절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에서 본다면 최근 몇 명에게서 들은 이야기인 "떨어진 자신감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어찌 되었건, 이렇게 내 인생의 갈림길을 하나 더 지나쳤다. 가지 않은 길이 회한으로 남지 않으려면, 좀 더 정신줄을 잡아야 되겠다.
p.s.
같이 고시 준비를 하는 누구 말마따나, 고시를 하는 블로거가 한동안 포스팅이 없다면, 열심히 공부를 하느라 포스팅할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반대로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늘어지는 상황이라 (귀차니즘에) 포스팅을 안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거기에는 나도 해당되려나.




